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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아지트가 필요한 이유 (유일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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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허기진 시절이었다. 굶주림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라 방황했고, 전공과목은 흥미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료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집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장소나 공간이 필요했다. 긴 시간을 머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충분히 사색에 잠겨 있을 수 있는 아지트가 내겐 필요했다.

 

간절한 덕이었을까, 그곳을 발견했다. 마산 석전2동 257-1 석전시장 2층 헌책방. 외부 창가 모퉁이에는 흔한 간판 대신 붓글씨로 ‘영록 서점’이라 씌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오래된 책 특유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대낮이었지만 어둡고 침침했다.  

 

LP판을 통해 전달되는 김광석의 목소리는 감성을 자극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수만 권의 책은 스스로 길을 내고 골목을 형성했다. 경이로웠다. 감격에 빠져 있는데, 멀리서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왔다. 사장님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여기 서점은 책이 얼마나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조용히 내 눈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120만 권 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드나들었다. 먼지 자욱한 바닥에 앉아 책을 읽었다. 읽다 졸리면, 사장님이 공수해온 널찍한 장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김광석과 유재하, 비틀스와 퀸의 노래를 실컷 들 었다. 헌책방 한구석에서 빈 종이에 목표와 계획을 써나갔다. 달성된 숫자보다 좌절과 실패의 횟수가 많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겐 아지트가 있으니까. 그곳에서 울고 웃으며 청춘을 아로새겼다. 

 

사장님의 이야기를 통해, 긴 시간 동안 헌책방을 지켜온 그의 삶도 알 수 있었다. “중학교 때, 그 당시 암울했었지요. 어른들은 일이 없어 대부분 놀았어요. 그 당시 공사판에 도시락 싸들고 가면 하루 일당이 500원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꼬마는 할 일이 없었죠. 요즘 같은 시대 라면 아르바이트라도 했겠지요. 그 꼬마가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보니 어떤 아저씨가 길가에 책들을 깔아 놓고 책을 팔고 있었지요. 아저씨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 그냥 집에 가라고 합디다. 3일을 계속 따라다니니깐 요령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요령이라는 것이 고물상으로 가서 책을 사서, 팔면 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5천 원을 어머니께 빌려서 리어카를 사고, 작업대를 만들어서 고물상에서 책을 사서 작업대에 올려놓고 책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첫날 책 3권을  팔았고, 총수입은 450원이었습니다.” 

 

서점 이름에 대해서도 물었다. “부산에 있을 시기에 친구들과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친구들하고 나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100평이 넘는 헌책방 가게를 해서 서예 작품하고 병풍도 걸어 놓고 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고 있었죠. 그때 옆에서 어느 스님이 밥을 먹고 계셨지요. 스님이 밥을 다 먹고 난 뒤 저에게 와서 옆에 앉아도 되냐고 해서, 앉으세요라고 했죠. 스님이 영록이라는 한문을  적어주었습니다. 다음에 큰 서점을 하게 되면 영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셨죠. 그 뜻을 그때는 전혀 몰랐고, 20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자 영에 푸를 록자 였는데, 나무가 크게 자라 오래되면 고목이 되고 그 그림자를 만들게 되어 사람들이 그림자에 햇빛을 피해 쉬어 갈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쉬어가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은 통한 것 같다. 나를 비롯해 자주 방문하는 분들의 표정은  늘 밝았다. 편안해 보였다. 모두의 아지트였다. 

 


 

그땐 몰랐다. 내 삶을 좌우하는 놀라운 발견이었고 귀중한 추억이 었다는 것을. 헌책방 사장님을 직접 취재하고 인문학 특강 강사로 섭외하게 될지도 몰랐다. 강연 제목은「헌책은 꽃보다 아름다워」였다. 서점을 소개한 첫 언론 기사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당신 삶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라며 웃으셨다. 

 

시간이 흘렀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서 공백이 생겼다. 그 간격은 종종 메일을 주고받으며 겨우 좁혀가고 있었다. 짬을 내어 한 번 들른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시간을 내어 갔어야 했다. 2017년 10월 이후 좀처럼 답장이 없는 사장님이 걱정됐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신문 기사를 통해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한동안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 

 

아직 영록 서점을 대체할 그곳을 찾지 못했다. 찾고 싶은 마음이 그때처럼 절실하게 닿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마음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지트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하나의 공간이나 사람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이나 사람이 있는가. 인생을 살면서 기억에 남는 아지트가 있는가. 스스로와 타인에게도 거듭 묻게 되는 질문이다.

 


https://youtu.be/ah1jXl4M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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