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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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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대생이었다. 로봇 팔을 주물거렸고 도표를 그렸으며 알고리즘을 구상했다. 우연히 참가한 대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미스터리다. 얼떨떨하고도 적당한 기쁨에 빠져 며칠을 보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시무룩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 물음표는 계속 생기는데 느낌표는 멀어져만 갔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선이 이어졌다. 불편한 마음은 나날이 커졌다. 주변을 둘러봐도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다. 

 

그 무렵, '영록 서점'을 발견했다. '유일한 일상' 책 속에서 등장하는 그곳이었다. 그곳에서 삼시세끼를 챙겨 먹으며 손에 닿는 책을 읽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 '기자로 산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치열한 환경 속에서 진실보도를 추구하는 기자들의 땀과 눈물이 내 마음을 녹였다. 그때부터 글 쓰는 삶을 시작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빈 페이지를 마주했다. 엇,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한 문장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제야 알게 됐다. 나는 공대생이었고, 글쓰기와는 그렇게 가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물론 학창 시절부터 일기나 반성문은 즐비하게 써갔지만 제대로 배워본 적 없었다. 맞춤법 따위는 무시하며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낙서장이 내 글쓰기 이력의 전부였다. 그렇게 첫날은 조용한 카페에서 빈 페이지와 8시간 동안 눈싸움을 진행했고 며칠이 지나도 상황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겨우 꿈이라고 소개할만한 뭔가를 찾았는데 이렇게 무너지다니. 이후로도 계속 비슷한 감정이 반복됐다. 그때 만약 단념했더라면 어땠을까. 제법 시간이 흘러 '그때 그런 꿈을 꾸고 있었는데,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거든. 그래서 포기했어.'라는 지루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을까. 처음 쓰기 시작했던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벌써 13년 전이니까 제법 오랜 시간 잘 버텨낸 것이다.

 

늘 쓰는 데 망설였고,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데도 괴로웠고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건데요?'라고 물어보면 제법 심심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그저, 썼다.
계속 썼다.
쓰고 쓰고 또 썼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닥치는 대로 썼다. 질보단 양으로 승부했다. 좋은 칼럼이나 프란츠 카프카, 김영하, 김훈 작가의 작품을 필사했다. 손으로 쓰다가 팔이 저려서 키보드로 두드렸다. 편지도 하루에 다섯 통 이상 썼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쓰는 것보단 명확한 대상자(독자)가 있는 편지가 수월했다. 특히 당시 여자 친구에게 쓰는 편지는 네다섯 장을 넘겼다. 매일 편지를 받아 읽는 친구나 가족은 편지도 가끔씩 써야지 매일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 항의했지만, 무시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2년째가 되었을 때 티스토리를 시작했다. 처음 내 글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는 기회였다. 언론사에 제출할 이력으로도 써먹을 요량이었다. 첫 포스팅을 앞두고 며칠을 앓았다. 자료를 조사하고 관련 글을 대조하며 문장을 고쳤다. 그렇게 삼일 밤낮을 고생해서 썼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행 버튼을 클릭했다. 칭찬은커녕 비난과 악성 댓글을 마주하면 어떡하지? 혼자 중얼거렸는데 그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내 글에 관심이 없었다.

 

에이 설마, 하면서 며칠을 지켜봤는데 조회수는 10회였다(그중에서 9회는 나였다. 1회는 누구였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관심이 없다고?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발행 버튼을 눌러도 많은 이들이 내 글을 안 찾는다는 거지. 좋았어. 계속 써보자. 그렇게 부담감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한결 쓰는데 수월했다. 대신 한 사람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을 생각하며 썼다. 주제도 다양했다. 일상부터 책, 영화, 사랑, 여행 쓸 수 있는 건 다 썼다. 카테고리 구분해가면서 여유롭게 쓸 실력도 아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했다. 

 

윤색하지 않고, 그저 계속 썼다.

 

 


 

 

내 청춘의 찬란함은 그렇게 시작됐다. 찬란함이라고 표현하면 몹시 화려한 조명 빛이 내 몸을 감싼 것처럼 여길 수 있겠지만 그렇진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무작정 시작했던 글쓰기를 통해 내 삶의 궤적이 다채롭게 변했다는 것이다. 이후 경험했던 것을 기록해보면 아래와 같다.

 

언론 단체 간사, 보도자료 및 성명서 작성, 신문기자, 칼럼 기고, 시사 라디오 인터뷰 대본 작성 및 DJ, 인문학 강연 홍보 책자 제작, 인생의 아지트 영록 서점 박희찬 대표님을 취재해 독립출판 진행, 단편 영화 시나리오 작성, 교육 영상 대본 작성, 초등생 글쓰기 교사, 브런치 작가 레이블 팀라이트 구성원, 뉴스레터 제작 및 발송, 최근 출간한 첫 산문집 '유일한 일상' 발간.

 

오늘 글쓰기를 주제로 이것저것을 기록하며 문득 궁금증이 밀려왔다. 현재 기준으로 티스토리, 네이버, 브런치까지 얼마나 많은 양의 글을 썼을까. 브런치 작가의 서랍 속 글 몇 가지를 마저 포함하면 아래와 같다.

 

1단계 티스토리 217개

2단계 브런치 301개

3단계 블로그 359개

총 877개

 

물론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수년간 계속 쓰기만 했겠는가. 안 비밀인데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침체기였다. 넋두리를 일삼았지만 그때도 쓰긴 썼다. 안 쓰고 괴로운 것보다 더 나았으니까. 

 

(좌- 북토크 홍보 포스터 / 우- 독서 후 인증샷 릴레이) 조용히 깨알 홍보. '유일한 일상' 1쇄 완판되었습니다. 곧 2쇄 들어갑니다. 오예!

 


곧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1월 29일 토요일 밤 9시 팀라이트 인사이트 나이트가 진행되는데, 강연 주제는 '글쓰기'다. 숱한 작가님 중에 따스한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내가 강연을 맡았다. 주제는 오늘 제목과 동일한 '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다(지난해 7월 진행했던 동기부여 강연 '시작을 망설이는 당신에게'에서 앞부분만 바꿨네요,라고 누가 물어보시던데 맞는 말씀이다). 

 

이론적인 내용은 더 저명한 작가님이 해주실 테니, 나는 경험해서 비롯된 실패담을 공개할 것이다. 물론 노하우도 있다. 처음 쓰기를 시작했을 때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글 쓰는 비법'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니라 '실패를 통해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언해주는 선배'가 필요했으니까. 춘프카가 그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감히.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보다'에선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신이 예술가가 될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될 수 없는 수백 가지의 이유'가 아니라 '돼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글을 써야만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나요?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세요.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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