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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친구 그리고 '크눌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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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웠던 친구를 만났다. 서로가 다시 마주하기까지 삼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친구는 여행을 떠나기 전, 빈번히 가던 호프집에서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자유롭고 싶다. 곧 떠날 거다.”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뒤 자신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떠났다. 아무런 계획 없이. 오직 자유를 꿈꾸며.

 

까무잡잡하게 타 있는 친구의 모습에서 여행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는 애초에 여행이 이토록 길어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며, 자신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신 좀 차려!"라며 머리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로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엄숙해졌다. 그냥 묵묵히 그리웠던 친구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파란만장한 여행담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만남은 짧았다. 떨어져있던 긴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친구는 며칠 뒤 비행기를 타고 다시 떠난다고 했다. 짧은 국내 체류기간 중 나를 만나러 광주까지 온 것이었다. 고맙고 미안했다. 나는 준비했던 몇 가지 선물과 손 편지를 건넸다. 남자끼리 무슨 편지냐며 친구는 웃었다. 곧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친구를 태운 버스가 안 보일 때까지, 한참을 손 흔들었다. 팔이 저렸다. 그 저림은 점차 팔에서 가슴으로 퍼져나갔다.

 

뚜벅뚜벅 걸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곧장 서점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서 지난번에 만났던 성실한 남자 직원을 또 만났다.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있었다. “저기, 헤르만 헤세 책 중에서…”나의 짧은 설명을 기다렸다는 듯 단 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어디론가 움직였다. 뒤를 쫓아갔더니 어느 곳에 멈추어 책 한 권을 꺼내며 말했다. “손님, <크눌프> 맞죠?”나는 끄덕였다. 그 책이 맞았다. 떠나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읽다 말았던 소설 속 주인공 크눌프가 떠올랐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초봄’, ‘크눌프에 대한 회상’, ‘종말’의 세 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각각의 작품이 따로따로 발표된 적도 있을 정도로 한 편 한 편이 완결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구성을 지닌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가정을 이룬 안정된 정착 생활과 뿌리 없이 떠도는 방랑 생활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본능을 다루고 있다. ‘초봄’에서 크눌프는 방랑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으면서도 고단하지 않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의 세계는 평범한 직업인들의 질서 잡힌 세계이며, 그러한 질서에 어울리지 못하는 크눌프는 그러한 사람들이 엮어 내는 삶의 관찰자가 된다. 천진스럽고 남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몰두하는 크눌프이지만, 그에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방랑하는 자의 고독이 함께 하고 있다. 소시민적 행복에 안주하지 못하는 크눌프의 심리는 그의 눈에 비친 친구 에밀 로트프스의 삶을 기술하는 것에 드러나 있다.

 

예쁜 아내와 작은 가죽 공장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자족하며 사는 에밀 로트프스. 앞날에 대한 소소한 꿈과 목표를 가진 그를 바라보는 크눌프는, 이미 그들과 동화되기 힘든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의 아내가 던지는 추파를 통해, 소시민적 행복이 안고 있는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방랑자 크눌프의 몫이었다. 다만, 방랑자의 처지에서도 크눌프는 스쳐 가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고달픈 세상살이를 잊을 수 있게 해주는 여유가 있다.

 

이어지는 ‘크눌프의 대한 회상’에서 작가는, 세상에서의 대개의 진실이 그렇듯이 무척 무겁고 경우에 따라서는 암울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길을 혼자서 가는 고독한 존재라는 것, 하지만 그러한 고독이 있음에도 아름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긴 세월이 흘러 병들고 지친 크눌프의 마지막 여정은 ‘종말’이다. 첫 여인 프란치스카와 옛집이 있는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방랑의 일생에 대한 회한뿐이었다. 나약해진 크눌프에게 신은 그의 회한이 자신의 뜻이었노라고 말한다. 크눌프는 그 말에 시인한다. 회한뿐인 인생이지만 신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고, 또 신의 의지를 인정하면서 방황으로 점철된 크눌프의 인생은, 사람이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되묻게 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낯선 이국땅에서 소년 같은 미소를 보이며 살아가고 있을 친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만났던 새 친구(?)를 소개해줬다. 덧붙여 꼭 <크눌프>를 읽고 느낀 점을 함께 공유하자고 썼다. 물론 아직 답장은 없다.

 

친구의 긴 여행의 끝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나는 지금처럼 그가 결코 외롭지 않도록, 묵묵하게 가는 인생의 모습을 지켜봐주고 들어주는 좋은 벗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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